내가 만난 홍승희들???

By | 2017년 12월 4일

한겨레 신문에 홍승희 씨가 ‘내가 만난 유아인들’이라는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홍승희 씨의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촛불집회 정국에서 이른바 ‘효녀연합’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의 패악질에 평화적으로 대응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레자식 연합’이나 ‘호로새끼 연합’ 같은 것 만들어서 나이값 못하는 것들 싸대기나 좀 후려갈길까 생각 중이던 나는 이 발상의 참신함과 바탕에 깔린 평화 존중 사상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심지 굳은 젊은이의 앞길에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랬ㄷㅏ.

 

허나 ‘내가 만난 유아인들’은 아쉽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글입니다. 전반적으로 함량미달이기 때믄에 이 글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홍승희 씨가 범하고 있는 논리적 오류를 몇 개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그 전에 한겨레 편집진의 안목 부재에 대하여는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함량미달이긴 하지만 홍승희 씨는 얼마든지 이런 글을 쓸 권리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는 민주국가에서 자신의 견해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장된 천부인권입니다. 나는 이런 글을 쓴 자체에 대하여는 절대로 시비걸지 않는ㄷㅏ. 나는 심지어 사드의 소설도 모두 출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허나 이런 논리적으로 함량미달의 글을 쓰는 것과, 이런 글이 진보 정론지를 표방하는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랜 기간 글쓰기 훈련을 거친 편집진이라면 이런 글은 개재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한겨레 신문은 인터넷 블로그가 아닙니다. 페미니즘을 표방한다 해서 내용에 대한 검증 없이 아무 글이나 올리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글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만난 유아인들’의 전문을 올린ㄷ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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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했습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리가 어이없어서 웃는ㄷㅏ. 내 안에 섞여버린 그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빙빙 돌다가 노트북에 손을 얹었ㄷㅏ. 그는 나를 과거로, 타자로, 히스테리로 밀어냈ㄷㅏ. 처음부터 그랬ㄷㅏ. “나는 페미니즘 공부 안 해도 돼. 우주와 진리를 알면 되니까. 언어에 갇히기 싫어.” 이후 페미니즘을 공부하던 그는 “나도 피해자”라고 공평하게 반씩 생활비를 내고, 자신의 나약한 남성성을 위로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이랬ㄷㅏ. “너는 너무 극단적이야. 동료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너 혼자서 서 있는 주체가 되어야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다른 사회적 관계가 없었던 그는 내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가 될 때 못마땅하게 여겼ㄷㅏ. 정작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나에게 의존한 건 자신이었으면서. 그는 나를 ‘의존적 인간’이고 페미니즘을 말하는 나를 ‘극단적인’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ㄷㅏ. 내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는 위기감을 느꼈ㄷㅏ. 그림이 팔려도 그 앞에서 신나게 표현하면 안 됐ㄷㅏ. 그림을 그리는 그가 박탈감을 느낄까 봐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ㄷㅏ. 그의 경제적 무능과 정서적 무능함, 학습하지 않는 게으름에 내가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면 나의 말은 ‘구박, 잔소리, 바가지’가 되었ㄷㅏ. 그는 내게 고함을 지른 후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꾸 구박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없어?” 감정노동에 지치다 폭발한 여자가 내뱉는 말은 동등한 언어가 되지 못합니다.

 

페미니즘이 거슬리는 남성은 여성들이 피해의식이 너무 크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모든’ 남성입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이 상처받은 얘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ㄷㅏ.

얼마 전 논란이 된 유아인의 글에서 오랜 익숙함을 느꼈ㄷㅏ. 유아인의 말은 새롭지 않ㄷㅏ.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가요. 뉴스에서 많이들 보셨죠. ‘악’이 두려워 그 ‘악’을 외면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경험했습니ㄷㅏ.” 익숙한 너도나도 피해자 서사ㄷㅏ. 장문의 글에 온갖 추상적인 개념이 가득하고, 페미니즘을 한 줄도 공부한 적 없으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당당함.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자신이 거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 페미니즘의 의미마저 자신의 의미로 먹어치운ㄷㅏ.

 

나는 많은 유아인‘들’을 만났ㄷㅏ. ‘너에게 배우고 싶다’, ‘너의 글이 너무 좋아’라고 접근한 의미 중독자들. 남성 인간 주체의 주체뽕, 예술뽕, 해탈뽕은 고질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에 끌렸을까. ‘나도 여자만큼 피해받았어. 나도 착취받았으니 보살펴줘, 5 대 5로 데이트 비용도 내야지. 보살피는 게 페미니즘의 윤리 아니야? 해튼 나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거야’ 하는 속셈이었을까. 놓기 힘들 거ㄷㅏ. 세상의 주인공은 주체인 나, 의미를 쥔 자신이니까. 달콤할 거ㄷㅏ. 타자를 히스테리한 존재로 눌러버리는 우월감은. 타자를 걱정하면서 얻는 도덕의 주체가 된 우쭐함은.

 

‘말하는 사람과 눈 마주치기. 몸통을 그에게 향하기. 고개 끄덕이기. 판단 중지. 답 내리지 않기.’ 평화교육 모모에서 진행하는 평화감수성 워크숍에 참여했습니다. 위 방법은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평화감수성’의 기본자세ㄷㅏ.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눈앞에 있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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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글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전반부의 내용은 글쓴이의 옛날 애인에 대한 비판적인 회고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적어도 동거 관계에 있었던 것 같고, 혼인신고까지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글에 나타나 있지 않ㄷㅏ. 남의 프라이버시를 더 이상 파고들기도 예의가 아닌 듯하고, 어디까지나 글쓴이가 밝힌 만큼만 언급하도록 합니다. 아무튼 경제적인 문제로 많은 다툼이 있었던 것 같ㄷㅏ. 언급된 남자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생략하도록 하겠ㄷㅏ. 살짝, 아주 살짝, 미세하게, 나이를 먹으고 깨달은 것이 있따면, ‘다른 사람의 남녀상열지사엔 관여하지 않는다’입니다. 여기 섣불리 개입해서 의견냈다가 피 본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이 글 전반은 순전히 본인의 옛 애인에 대한 디스입니다. 전반부가 지나면 이 글은 그 남성의 찌질스러움을 정리하더니만, 갑자기 유아인에 대한 비판으로 건너뛴ㄷㅏ. 예전에 내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던 시절에 누가 이런 식으로 논리 점프를 시도하면 나는 이랬ㄷㅏ. “뒤질래?(젠더 폭력성 쩔지? 다만 나는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공평하게 이런 표현을 이용했습니다. 그냥 내가 폭력적인 인간이라고 결론 내리자.) 물론 강물에 왼발을 디디고 그 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디디고, 다시 그 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디디고, 이런 식으로 뛰어가면 한강도 뛰어서 건널 수 있지. 한 번 해봐. 그게 되나.”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습니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참으로 인생은 살기 어려운데 글을 이렇게 쉽게 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으면 한다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습니다.

 

주구장창 옛날 애인에 대한 디스를 해놓고, 이것이 유아인 비판이라고 하는 것, 미안하지만 이런 건 예전부터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인간이 흔히 범하는 논리적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흔하느냐 하면 시중에 나도는 ‘논리야 놀자’ 수준의 중학생 대상의 기초 논리 서적에도 소개되는 오류 사례입니다. 예술하시고 페미니즘 공부하시느라 논리학 공부는 좀 소홀하셨던 모양입니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실물 크기의 이소룡 브로마이드를 세워놓고 열라게 두드려 팬 다음에, ‘나는 이소룡을 이긴 사나이입니다.’라고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유아인의 한 문장에서 오랜 익숙함을 느꼈다는 것… 정말 이런 말 입에 담기도 민망합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어지간한 고등학생도 이건 안ㄷㅏ. 신나게 허수아비를 두드려놓고, “봤지? 나 이런 사람이야!” 하더니만, “유아인! 너 이런 말 했지? 내 옛날 애인하고 똑같네?” 이런 식의 논리 진행… 다시 말하지만 홍승희씨가 본인의 블로그에 이런 글 올리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걸 기사화한 한겨레 편집진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한경오는 돈없는 조중동이다’라는 주장에 동조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든ㄷㅏ. 조중동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냐? 니네 독자들이 시시껄렁한 글 몇 개 올리면 여론 통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냐? 허나 ‘경오’는 일단 빼겠ㄷㅏ. 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유아인들’을 만났다는 홍승희 씨에게 질문을 하나 던진ㄷㅏ. 진짜 유아인을 만난 적이 있는가? 무슨 근거로 유아인이 여성들에게 “‘너에게 배우고 싶다’,‘너의 글이 너무 좋아’라고 접근한 의미 중독자”라고 단정짓는가? 물론 나도 유아인을 만난 적은 없으니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 정도 되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가진 사람이 당신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할까? 혹시 이명박을 만나고 유아인이라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솔까말… 나같은 경우엔 세상에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 몇 없다는 경험에 입각한 자부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 홍승희 씨에게 접근하고 싶다면 아마 다른 식으로 접근했을 것 같ㄷㅏ.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너의 글은 아직 모자라'(그러고보니 이미 그러고 있네 ^0^) 대한민국 남성들의 숫자만 대략 이천만 명이 넘을 텐데, 본인이 만난, 심지어 본인 수준만도 못한 얼간이들만 상대한 경험으로 전체 남성을 재단하려 하다니, 과대망상이 좀 심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ㄷㅏ.

 

그래도 홍승희 씨는 대단히 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ㄷㅏ. 옛날에 만난 몇몇 찌질남(물론 그들도 홍승희 씨에게 할 말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들을 유아인 급으로 격상시켜주었으니. 나도 예전 애인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말할 때마다, ‘장동건? 남자는 다 똑같아, 내가 예전에 도비공이라는 인간을 만났는데 장동건이나 뭐 다를 거 하나도 없어.’ 이런 식으로 말해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ㄷㅏ.

 

이렇게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논리학적으로 오류로 규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진행하던 이 글은 유아인에 대한 충고로 끝난ㄷㅏ. 기도 안 차서 이 부분만 다시 인용합니다. 

 

‘말하는 사람과 눈 마주치기. 몸통을 그에게 향하기. 고개 끄덕이기. 판단 중지. 답 내리지 않기.’ 평화교육 모모에서 진행하는 평화감수성 워크숍에 참여했습니다. 위 방법은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평화감수성’의 기본자세ㄷㅏ.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눈앞에 있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며칠째 같은 내용 반복해서 쓰려니까 좀 귀찮은데,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는 글에 ‘한남 돋는다’라고 정체불명의 인간(인지 침팬지인지도 이제는 확신도 못하겠다)의 댓글에 유아인 씨가 발끈한 게 이 사태의 시작입니다.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눈앞에 있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귀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든 없든, 아무나 눈 앞에서 뭐라고 하면 귀 기울여야 하나? 홍승희 씨는 눈 앞의 건장한 사내가 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본인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하면, 그에게 “눈을 마주치고, 몸통을 그에게 향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판단을 중지하고, 답을 내리지 않을 것인가?” 온이 되었든 오프가 되었든 명백하게 나에게 폭력적인 메세지를 보내는 이에게 그런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럴 때는 그냥 전기 충격기 한 방 목덜미에 지져주는 게 더 나은 태도가 아닐까? 지금 유아인 씨는 본인에게 폭력성향을 보이는 정체 불명의 집단에게 그렇게 대응하는 중입니다.

 

홍승희 씨는 남에게 ‘눈 앞에 있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라고 충고하기 전에, 본 적도 없는 타자를 제 멋대로 규정하고 충고하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