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추들의 도피처로 전락한 페미니즘

By | 2017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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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이라는 영화에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ㄷㅏ. “애국심은 건달들의 마지막 도피처.”

 

요즈음 벌어지는 워마드 – 유아인 사태를 보고 나는 약간 바꿔 말하고 싶ㄷㅏ. “페미니즘은 똘추들의 마지막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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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세력들의 발악이 현실화한 지금, 자유한국당 무리들을 씹기도 바쁜 이 시간에, 워마드 호주녀 사건이니 유아인 애호박 드립이니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올리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고민이 영화평론가 박우성이의 고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무슨 이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도 아닌데 그런 거 저런 거 따지는 전략적 글쓰기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쓰고 싶은 거 있으면 내키는대로 쓰는 거지. 인문학 전공 고학력 백수를 완곡하게 일컫는 다양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유아인같은 스타 배우조차 자신의 눈치를 볼 정도의 대단한 문화권력으로 착각하는 박우성이나, 듣보잡 블로거 주제에 시국과 연관된 전략적 글쓰기를 고민하는 나나 뭐 그리 근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잠시나마 그런 고민을 했다는 점이 부끄러울 따름이고, 아무리 타락해도 박우성이 같은 부류는 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ㄷ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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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정의당 메갈리아 사태가 구설수에 올랐을 당시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자 메갈리아 운영진의 인터뷰를 읽었고, 미러링이라는 그들의 방식이 대단히 참신하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ㄷㅏ. 예전에 쓴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소시적에 고은광순님이나 조이여울씨, 노혜경님, 김정란님 등등..의 우리 사회의 네임드 페미니스트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분들에게 감화된 바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 영향으로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내가 페미니스트 그룹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의 글을 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ㄷㅏ. 그리고 메갈리아의 취지에도 상당 부분 공감을 했습니다.

 

내 첫 번째 직장은 학원연합회였는데, 학원장들이 본인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나는 그 시다바리해주고 뭐 이런 일이었ㄷㅏ. 그런데 당시 성동지부장 직함의 나이 든 남자 원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분은 정말 음담패설계의 에반겔리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임 때마다 음담패설을 하나 준비해와서 많은 남녀 학원장들 앞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뒷자리로 물러났는데, 싸해지는 분위기와 마지못해 웃어주는 여성 원장들의 썩소에 가까운 표정을 본인만큼은 환호로 착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인간적인 흠결을 잡을 수는 없는 사람인데다가, 연배도 많은 편이어서 누구도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참조 넘겼는데, 나 역시 참조 넘기기는 했지만, 그 저열한 음담패설을 들을 때마다 등골이 뒤틀리는 느낌이었ㄷㅏ. 저열한 와중에도 그나마 재미라도 있으면 용서가 되겠는데 어디 고금소총 수준의 음담패설을 매주 하나씩 발굴해오는 그 고리타분함이란… 이 아자씨를 어쩌나, 언제 날 잡고 음담패설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강의를 해줄까 진지하게 고민도 많이 했었ㄷㅏ.

 

또 다른 원장 하나의 입버릇은 “여자의 노는 예스다”였ㄷㅏ. 무슨 제안을 했을 때 상대 여성 원장이 ‘안 된다’라는 말을 하면 ‘여자의 노는 예스라던데 긍정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ㄷㅏ.” 이런 식으로 상대의 반응을 싱글싱글 웃으고 사실상 묵살해버린ㄷㅏ. 이 말은 나에게 끝없는 궁금증을 유발했습니다. 여자의 노가 예스라면 여자가 예스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노를 의미하는 것일까. 여자의 말은 무조건 반대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 원장의 행태를 보면, 여성 원장이 자신에게 긍정할 때는 절대로 ‘여자의 예스는 노라고 하니, 제가 좀 더 생각해볼게요.’ 따위의 멘트를 날린 적이 없었ㄷㅏ. 여자의 예스는 예스, 여자의 노는 역시 예스. 여자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예스만을 말하는 이른바 ‘예스 우먼’ 내지는 ‘예스 마담’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내가 비록 여자는 아니지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것일까.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ㄷㅏ. 그런 점에서 메갈리아의 이른바 미러링이라는 방법론은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었ㄷㅏ. 습관적으로, 관행적으로 남성들이 문제의식 없이 말하는 수많은 이른바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뒤틀어, 니가 이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냐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 대단히 참신했을 뿐더러, 한 때 문학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이 ‘미러링’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실은 전통적인 문학의 한 양식인 패러디에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ㄷㅏ. ‘허벌보지’의 미러링으로 ‘실자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메갈리아 운영진의 항변을 읽으고 배를 잡고 구르고 웃다가, 정말 놀라운 언어 센스라고 마음 속으로 극찬을 했습니다. ‘소추소심’은 또 어떤가. 이 단어를 듣는 순간 군대 동기 한 놈의 얼굴이 떠오르고 하마터면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갈 뻔 했습니다. 다만, ‘대추’라고 해서 꼭 ‘대심’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남성들은 대체로 소심하다는 것을 잘 모르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지금도 메갈리아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먼 훗날 대한민국 인권 발전사를 정리하면 필히 언급해야 할 획기적인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평가합니다.

 

1.

 

어떤 사회 운동의 외연이 확장되면, 어느 순간부터 그 운동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운동에 참여하는 시점을 맞이합니다. 이건 일반법칙이라 이름붙여도 무방할만큼 대부분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던 저녁,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 번 부인합니다. 자칫했다가는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워지는 상황이었기 때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본인이 순교를 당할 때 감히 예수와 같은 자세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다고 거꾸로 매달려 최후를 맞이합니다. 순교의 부담이 없는 오늘날 자칭 예수의 제자들은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를 외치는 일에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는ㄷㅏ. 

 

타락에 있어서는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ㄷㅏ. 언젠가 내가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고 상대적으로 불교의 청정함을 얘기하자 나이 지긋하신 분 한 분이 빙긋이 웃으며, 기독교는 풋내기, 불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적폐, 워낙 오랜 시간 노하우가 쌓여 남들 앞에서 설치지 않고 조용히 타락했을 뿐이지 오히려 규모는 더 방대하다라며, 한 가지 사례로 국립공원 입장료가 사찰로 들어가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국립공원 내에 있는 자그마한 사찰 하나의 수입이 순복음 교회 헌금을 능가한다는 것이 그분의 말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몇 년 후 국립공원 입장료 문제가 표면화되면서 그분 지적의 기억이 떠올라 전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 타락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이 있을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나. 이미 워마드 게시판이나 유아인 SNS에서 설치는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망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러링이 남성들이 행하는 여성혐오를 역지사지로 느끼게 하는 효율적인 수단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만능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남자 화장실에 몰래 숨어 있다가, 무방비 상태로 지퍼를 내리고 볼 일을 보는 남자를 뒤에서 흉기로 찔러 죽인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미러링이라고 아무리 항변해봐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건 그냥 범죄일 뿐입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 여성혐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는 있으나 그 자체가 범죄이고, 굳이 그 범죄를 미러링해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살인범은 체포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안은 똑같이 행동함으로써 심각성을 인식시킬 필요 없이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공권력의 각성을 요구해야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어떤 종류의 철학적 사유도 아니고, 그냥 정상적으로 학교 교육만 받았어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입니다.

 

허나 워마드 호주녀 사건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어떤 부류의 정신 나간 집단들에게는 이런 상식이 약간도 설 자리를 얻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ㄷㅏ. 아동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은 남성들의 아동성추행의 미러링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아동 성추행이 남성들에게 보장된 어떤 권리는 절대 아니고, 형법으로 다루어지는 범죄행위에 불과합니다. 물론 페미니즘의 역사가 근대 이후 참정권, 재산소유권 등, 남성에게만 허가된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페미니스트 선각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내가 알기로 그 누구도 범죄행위권(?) 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문제가 확대되어 호주 경찰이 나서는 정도까지 이르렀고, 최초 게시글 작성자로 알려진 이른바 호주녀(?)가 호주 경찰에 체포되는 사태에 이르렀ㄷㅏ.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워마드 운영진과 게시판 사용자들이 ‘평소 워마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남성들이 게시물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항변합니다. 좋ㄷㅏ. 인정해주마. 그렇다고해서 워마드 게시판 사용자들의 똘추스러움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원글 작성자로 현재까지 알려진, ‘호주녀’의 입장에서는 제 밥벌이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거나, 아니면 호주 법무부에서 제공하는 무상급식을 제공받거나의 갈림길에 선 중요한 문제이기는 합니다. 만약, 이른바 ‘호주녀’가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라면 법정에서 무죄를 인정받고 자주의 몸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허나,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유무죄와 상관없이 워마드 게시판 사용자들의 똘추스러움이 현명함으로 돌변하지는 않는ㄷㅏ. 

 

물론 사람이 많이 모인 집단이라면 튀고 싶다는 일념에 별 해괴망칙한 짓을 하는 똘추들 한두 명이 본인의 똘추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는 다반사입니다. 허나 정상적인 커뮤니티라면 그딴 게시물이 올라왔을 때, ‘아무리 우리가 미러링을 한다지만 이건 아닙니다.’라는 자정의 목소리가 그런 똘추 짓거리를 뒤엎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내가 알기로 워마드에서 이런 자정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ㄷㅏ. 도리어 너도나도 동참하고 분위기를 더 범죄적으로 이끌어가는 미친 댓글러들만 난무했던 것으로 안ㄷㅏ. 언제부터 이런 근본도 없는 작자들의 또라이짓이 페미니즘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포함되었는지 나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호주녀의 아동 수면제 성추행글이 그녀의 실제 경험담이라면, 거기 동조한 작자들은 범죄행위의 동참, 내지는 최소한 옹호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것이 워마드를 증오하는 남성의 낚시글이었다면, 거기 동조한 작자들은 기본적인 판단력도 없는 금붕어 아이큐의 소유자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본인의 정체성이 범죄자이냐, 저능아이냐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 대단히 괴로운 작업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허나 이 똘추들은 그 아픔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발전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 동굴에 가둬놓고 백일 동안 쑥하고 마늘만 먹이면 인간이 될까?

 

대가리에 든 것 없는 인간들이 본인의 지적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사상체계를 접하게 되면, 세상 진리는 혼자 다 깨달은 것처럼 오바하고 미쳐 날뛰는 경향이 있습니다. 레닌은 이런 경향을 소아병(小兒病)이라 일컬으고 경계했고, 우리 조상들은 보다 친근한 어감의 ‘지랄병’이라 불렀ㄷㅏ. 지랄병하는 똘추들이 미쳐 날뛰다가 그 결과로 우연찮게 의미있는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따면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은 세계의 대부분 사람들이 동경하는 심오한 사상의 본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침팬지 무리에게 악기들을 던져준다 해서 그들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기본적으로 똥된장도 구분 못하는 작자들이 다음 타겟으로 삼은 것이 내가 보기엔 영화배우 유아인 씨인 것 같ㄷㅏ. 여기에 대하여는 이미 작성한 글이 있기 때믄에 더 길게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하고 코찡끗할 것 같음’이라는 정체불명의 댓글을 남겼고 유아인은 거기에 대고 ‘애호박으로 맞아봤음? 코찡긋’이라는 답글을 남겼ㄷㅏ. 여기에 대고 ‘그냥 한 말인데 애호박으로 때린단ㄷㅏ. 한남 돋는ㄷㅏ.’라는 제3자의 답글이 달리면서 이른바 애호박 드립, 심지어 애호박 게이트로까지 불리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유아인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일군의 지랄병 환자들에 의해 세상 대부분 여혐의 화신이라는 되는 양 공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는 표현에 젠더 폭력성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 지랄병 환자들의 주장인데, 그것도 인정해준ㄷㅏ. 나는 대인배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되묻고 싶ㄷㅏ. 이미 관용어로 굳어진 ‘~로 맞아봤음?’이라는 표현과 ‘한남 돋는다’라는 표현 가운데 젠더 폭력성이 더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어느 쪽인가? 깊은 성찰 없으면 찾기도 힘든 숨겨진 젠더 폭력성과, 대놓고 한국 남성의 여혐 경향을 미러링하겠다는 취지로 개발해낸 ‘한남충’이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한남 돋는다’는 표현의 젠더 폭력성이 동일 선상에서 언급될 사안인가? 길 가다 옷깃이 스쳤다고 따귀를 때린 격인데 여기에 발끈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저 그 작자들은 본인의 지랄병 성향을 표출할 공간이 필요했고 때마침 유아인이 걸려들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유명인이기도 하니 그런 이에게 당당하게 비판(?)하는 본인의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게 여겨질까. 나는 성찰없는 삶을 경계해왔지만, 이 사건을 통해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측면도 있긴 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거짓된 긍정적 에너지가 다른 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자기 성찰 없는 이들이 그런 것까지 고민할 리 만무합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는 문장에서 젠더 폭력성을 찾아내고 급기야 한남충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련의 프로세스는 사실 거의 한 세기 전에 활동한 매우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에 의해 정리된 바가 있습니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에서 ‘아버지는 사랑하나 총통은 사랑하지 않는’ 불경함을 이끌어내고 그런 말을 한 이에게 ‘조국의 반역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곡해해서 자신이 원하는 딱지를 붙이는 행위는 돌대가리도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입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상대가 말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믄에 수능에 따로 언어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 등장하는 한서희라는 장수 연습생에 대하여는 한마디 해야겠ㄷㅏ. 유명 남성 연예인과 대마초를 흡입한 것으로 이름을 알린 이 답 없는 젊은이는 이후 갑작스레 페미니스트 커밍아웃을 하더니 전방위적인 활동 중입니다. 다만 그 활동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지랄병의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어차피 연예인으로 뜰 것 같지는 않으니 노후 대비를 위해 욕쟁이 할머니 컨셉의 식당이라도 차릴 요량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는 짓거리가 정확히 여자 강용석입니다.

 

최근 워마드 사태나 유아인 SNS 사태와 관련해 강혁민이라는 사람이 본인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그 비판에 정당하게 대응하기는 커녕 과거 조작된 게시물로 법적인 판단이 이미 끝난 게시물을 개재해 ‘예비 강간범’이라는 딱지를 붙였ㄷㅏ. 강혁민 씨가 법적으로 대응할 것을 밝히자 한서희는 게시물을 삭제했습니다.

 

나는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예비 강간범’이라는 단어가 몹시 불쾌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직후에 많은 남성들이 자신 역시 잠재적인 가해자라 선언하고 여혐 문화 극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는 그들과 생각이 좀 달라 그 캠페인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참여한 남성들의 순수성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이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예비 강간범’이라는 표현은 캠페인에 동참한 남성들의 자기 성찰과 반성에 엿을 먹이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누구도 본인이 ‘아직’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이유로 단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서희 역시 ‘예비 꽃뱀’이나 ‘예비 매춘 행위자’내지는 ‘예비 마약 중독자’라고 공격당해서는 안 됩니다. 남성들에게 여혐의 기질이 내재되어 있다라는 분석까지는 타당하지만, 그렇기 때믄에 대부분 남성은 공격당해야한다라는 결론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반딧불이 수준의 하찮은 판단력을 바탕으로 세상의 대부분 남성을 심판하겠다는 돈키호테조차 뜯어말릴 턱없이 거대한 사명감을 품은 일군의 지랄병 환자들의 난장이 이 비극이라 부를 수도 없고 희극이라 부를 수도 없는 드라마의 출연진들입니다.

 

이념을 바탕으로 모인 집단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대부분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나누는 진영논리가 주가 되면 그 집단이 타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멀쩡한 검판사나 언론인 출신들이 자유한국당에만 들어가면 몇 달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망가지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이미 워마드는 과거 이른바 ‘좃린이 사건’으로 심하게 질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때 워마드 커뮤니티에서 정상적인 자정능력이 발동되었다면 건강한 커뮤니티로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은 진영논리에 급급해 좃린이 사건을 비호했고 그 결과물이 오늘의 호주녀 사건으로 나타났ㄷㅏ. 허나 여전히 워마드 운영진은 조작 가능성을 주장하고 변호사 마련을 위해 모금운동까지 진행중이라 합니다. 여혐 문화 극복을 위한 수단으로서 미러링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이고 이제는 그저 모여서 남 욕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정신질환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한 상황입니다. 기본적인 지능과 판단력도 바닥인데 학습 능력까지 없는 이들을 어찌 해야 할까. 대부분 인간은 발전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나의 교육관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 온 것 같ㄷㅏ.

 

2.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입니다. 허나 누군가 손에 태극기를 쥐었다는 것이 그가 애국자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이르러 태극기를 손에 쥔 사람들의 난동질은 일반 시민으로 해금 국경일에 태극기 게양마저 꺼릴 정도로 태극기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켰ㄷㅏ.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는 애국자이다’라고 외친다고 없는 애국심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경우야말로 ‘애국심은 건달들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격언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상황입니다.

 

페미니즘은 사회 진보 운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오랜 기간 작동해왔ㄷㅏ. 남성 진보유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해왔ㄷㅏ. 허나 최근 워마드 등지에 서식하는 일련의 지랄리스트들이 페미니즘의 깃발을 손에 잡는 순간부터 전체 페미니즘의 이미지마저 똘추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페미니즘은 똘추들의 마지막 도피처로 세간의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저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지 심각한 의문이 든ㄷㅏ.